몰입은 포기에서 시작된다

내 생각을 글로써 표현한다는 게 부끄럽지만, 한 번쯤은 세상에 내 생각을 꺼내보고 싶어 모니터 앞에 앉았다. 생각을 글로 꺼내 기록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재료를 모아 글로 정리해봤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분명한 사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돈을 많이 벌어서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 자기계발을 통해 일잘러가 되어 자기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아니면 온전히 나의 감정에 집중하며 행복한 순간이 연속되는 삶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기 위해 아둥바둥 노력하는 그런 사람. 하루는 내 노력을 되새기다 문득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몰입'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이 생각을 조금 더 깊게 다뤄보고 싶었다.

내가 무언가에 몰입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인간 관계, 물리적 공간, 보고, 듣고, 느꼈던 오감과 감정,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그리고 그 외에 영향을 주었던 주변 환경은 어땠을까?

궁극적으로, 몰입이란 무엇일까? 다소 형이상학적인 이 질문을 사유해보고 싶었다.

꼭 간절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은 하나씩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개발자로서 좋은 코드를 짜고 싶다던지, 유능한 직원으로서 맡은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던지, 다이어트를 통해 예쁘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싶다던지 하는. 극단적으로 최근에 만난 대학생 친구는 관심 있는 일이라면 모두 잘 하고 싶다고 했다.

목표를 세운 사람들은 곧 그럴 듯한 계획을 세우고, 부단히 노력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무한한 노력을 쏟는 사람도 있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기를 반복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원동력이 '간절함'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몇년 전 유행했던 동기부여 콘텐츠 영향일지 모른다. 당시에는 '간절스라이팅'(간절함 +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까지 거들먹거리며 비판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영향을 받은 거 아닐까.

'간절함'이란 단어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찢어지게 가난해봤던 사람은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는 논리, 얼핏 보기엔 완벽해 보였다. 세상 사람들의 노력을 이렇게나 간단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니! 물론 동기부여 콘텐츠들이 모두 간절함을 팔았던 것도, 간절함이 노력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뇌 속 한 켠에 '간절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무의식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건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애시당초 내가 겪었던 성공, 실패 경험은 간절함과 깊게 엮여있지 않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매순간 형형색색의 감정을 느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간절함이 아니었다.

아마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라도(정확히는, 그런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도) 24시간 내내 간절해 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거다. 친구를 만나 외로움이란 감정을 위로받을 거고, 답답함을 해소하러 산책을 나갈 것이며, 사랑하던 연인과 이별하고 아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던 스쳐가는 삶의 장면마다 상당히 다채로운 희노애락이 담겨있을 거다.

성공에 필요한 건,

내가 목표 달성에 성공했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회계 자격증을 2주만에 합격했던 경험,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발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갔던 경험, 해커톤에서 48시간만에 만든 제품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준 경험...

그러다 한 가지 생각에 꽂혔다. 모두 '몰입'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사실 '몰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대로 실패했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가고 싶었던 회사 면접에서 떨어졌던 경험,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거절당했던 경험, 리드를 맡았던 팀 단위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내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경험...

아직 몰입이란 단어가 어렴풋하지만, 몰입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재미있었다. 내 성공 방정식에는 몰입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나를 '재밌으면 미친듯이 하는데, 재미가 없으면 진짜 안 한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 표현과도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몰입'이 궁금해졌다.

몰입.

사람마다 서로 다른 가치관, 신념, 생각, 경험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주제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 공격을 감행한다. 그 중 특히 인상 깊었던 사람, 어떻게든 목표를 이뤄내던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몰입이란 관점에서 떠올려 본다. 목표를 이뤄낸 과정, 성공한 이유를 시간 단위로 물어봤던 적이 있는데, 싱겁게도 '그냥 했다'는 답변을 받았었다. 체계적으로 계획표를 작성하고, 뽀모도로 타이머라도 썼을 줄 알았는데...

'그냥 한다'는 말이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나는 재밌지 않은 일은 절대 그냥 못하기 때문에 뭔가 다른 동기 부여 수단이 필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몰입의 관점에서 해석해보기로 했다.

그러다 잠시 스쳐가는 생각 하나,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 시간동안은 '재미'와 무관하게 '그냥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선 몰입을 두 가지로 분류하기로 했다.

  • 미시적 몰입: 짧게는 몇 초, 길게는 시간 단위로 잡념 없이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것. – 보드 게임 한 턴 같은
  • 거시적 몰입: 여러 번의 미시적 몰입을 거치며 긴 호흡(며칠, 길게는 몇 년 단위)에 걸쳐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것. – 수능이나 자격증 공부 같은.

내 몰입 경험은 미시적 몰입이 오랜 시간동안 단순 지속(해커톤의 경우, 48시간 가까이 미시적 몰입 상태였다)되거나, 거시적 몰입 상황에서 미시적 몰입에 진입할 때 '재미'를 느끼는 상황(자격증 공부의 경우, 주변에 새로 배운 내용을 설명하며 재미를 느꼈고, 별 거부감 없이 미시적 몰입 상태에 빠져들곤 했다)이 주된 경우였다.

몰입을 시작하게 된 계기(재미라고 불렀던)는 주변 사람과 나누던 대화에서 온 영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렘, 물리적 공간 속 조명의 색온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책임감 등의 요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주변 환경과 내적 요인이 섞인 복잡미묘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몰입을 위해 재미가 필요하다는 걸 느낀 순간부터 그 요인을 하나씩 인위적으로 만들고 통제해보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에게 이 과정을 소극적으로 환경을 통제한다는 표현으로 설명했었다. 당시에는 이게 몰입을 위해서라는 생각은 못 했었는데, 이제는 연결된 느낌이 든다.

실제로 어느 순간부터 몰입을 위해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신호를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일에 몰입하기 위해서 카카오톡/인스타그램/슬랙 알림을 무시해야 했고,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을 떠나 높은 색온도의 조명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했고, 불필요한 걱정과 잡념을 의식적으로 없애야 했다. 의도적으로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기까지 했다.

문득, 몰입의 본질은 '포기'가 아닐까 싶었다.

포기는 몰입의 선행 조건

다시 성공, 실패 경험을 떠올려 본다. 미시적 몰입이 오랜 시간 지속됐던 해커톤 경험이 떠오른다. 해커톤이 끝난 뒤, 친구의 연락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연인의 연락까지도.

반면 면접에서 떨어졌던 경험에서는 모든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질문 하나에 내 경험을 열거하는 데 그쳤다. 정확히는, 어필하고 싶은 내 모습이 없었다. 보여지고픈 모습을 정의하고, 그 모습과 먼 경험은 배제하며, 의도적으로 질문/답변을 유도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몰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몰입하기 위해 '포기'해야 한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은 별로 못 본 것 같다. 자격증 공부를 한다거나, 돈을 벌고 싶다거나 하는 목표를 세운 뒤에 '뭘 해야 하지?'는 궁금해 하더라도 '뭘 하면 안 되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못 봤다. 지금도 나는 '돈을 잃지 말라'는 말보다 '포트폴리오를 구성해라'는 말이 더 와닿는데...

왜 그럴까? 막연함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일까? 미련 남을까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보고 싶어서일까? 중요한 신호를 골라내고, 소음은 무시하는 과정이 익숙치 않아서일까?

포기한다는 건,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목표는 갈래를 덕지덕지 붙여서 완성하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가지를 쳐내고 만들어진 명료한 이정표다. 떨어진 가지에 대한 미련, 내가 만든 길에 대한 불안함, 덕지덕지 붙였을 때 오는 안정감 때문일까?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포기하고자 노력한다. 특히 목표 자체를 충분히 실천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설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을 분석해 보여주는 기능을 구현하는 프로젝트로 예를 들어보겠다. 구현하기 쉬우면서도 관성적으로 보여줘야 할 것 같은 '동영상 길이'는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이 기능을 쓰는 유저가 궁금해 하는 건 수익일 거라는 가설 속에 '예상 수익' 기능에만 집중한다.

동영상 길이를 포기했기 때문에 해야 할 것 같은 단순 작업에 시간과 정신을 뺏기지 않게 되었고,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핵심에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핵심이 검증되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구현하면 되니까. 목표 또한 '영상을 분석해주는 기능을 만든다'에서 '영상 수익을 분석해주는 기능이 유용한지 검증한다'로 매우 명료해졌다.

정보의 홍수라 불리는 인터넷 세상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영국 여행을 갈 때 '런던에서 갈만한 곳'을 검색하는 것보다, '런던에서 꼭 봐야 하는 뮤지컬'을 검색하는 게 더 명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행 일정은 뮤지컬을 기준으로 많은 걸 포기해야 할테지만.

이처럼 포기는 단순히 무언가를 잃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덜 중요한 걸 의식적으로 덜어내는 과정이다. 결국 몰입으로 가는 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덧셈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뺄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Flow – 칙센트미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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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to Google Gemini Deep Research.

몰입을 포기와 연결지어 설명했던 사례나 이론을 찾아보다 칙센트미하이라는 심리학자의 'Flow'(몰입)라는 이론을 발견했다. 몰입을 위한 포기를 이 Flow 이론과 연결지어보고 싶었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이 단순한 집중을 넘어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며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상태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 이론에서는 몰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첫 번째 조건은 도전-기술의 균형이다. 이건 내가 하는 일의 난이도가 내 실력과 아슬아슬하게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너무 쉬우면 금방 지루해지고, 반대로 너무 어려우면 '이걸 어떻게 해'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버리는 거다. 딱 그 경계에 있는, 해볼 만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과제에만 온전히 빠져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명확한 목표다. 말 그대로 지금 내가 뭘 해야 하고, 그 다음엔 뭘 해야 할지가 분명해야 한다는 거다. 목표가 뚜렷하면 '이제 뭐하지?' 하고 방황하는 데 쓰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대신 그 모든 힘을 '어떻게 해낼까?'라는 한 가지 질문에만 쏟아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조건은 즉각적인 피드백이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삽질을 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 신호를 통해 나도 모르게 행동을 고쳐나가면서, 그 아슬아슬한 '도전과 기술의 균형'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상당히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자의식의 상실'과 연결짓는다는 점이었는데, 몰입을 위해서는 '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입하는 순간에는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이나 스스로를 채점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뇌과학에서는 이걸 자기 비판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가 잠시 쉬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가 하는 행동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몰입이라 부른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탈락했던 그 면접 상황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자아, 나의 모든 것을 알려야 한다는 욕망이 앞섰었다. 반면 해커톤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친구에게 답장을 했는지조차 잊었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오직 코드 작성과 문제 해결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결과에 대한 집착, 타인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 같은 '자아의 소음'을 포기하고 비로소 행위 자체와 하나가 되는 Flow(몰입) 상태에 도달했던 것이다.

최고의 몰입을 위해 무엇을 더할지 고민하는 대신, 무엇을 덜어낼지 질문하는 것. 마치 조각가가 돌덩이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쳐내며 조각하는 것처럼 목표를 가로막는 무수한 가능성과 소음, 그리고 가장 버리기 힘든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포기할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아무런 노력 없이도 흐르는 듯한 최적의 경험, 즉 몰입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거 아닐까.

포기하는 기술을 터득할 나를 기대하며...

사실 '몰입 = 포기 = 선택 = 집중'이라 생각한다. 허무하고도 뻔한 이 사실을 말하기까지 소용돌이같은 생각의 타래를 거쳤다. 하지만 이 글을 구상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글을 작성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알차고 가치있는 재료를 얻었다.

요즘 나는 살아오던 삶에 대한 관성을 거부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수를 돌리고 있다. 목표, 방향, 방법, 놓아야 할 것과 잡아야 할 것 등 온갖 고민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불안과 공포, 기대, 두려움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포기가 아닐까. 부정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고민에 대한 일차원적인 포기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나 자신, 자아를 포기하고 다시 재조합하는 한 층 더 메타적인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1년, 3년, 5년 뒤 돌아본 나는 지혜로운 포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길.